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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1982년, 프로

스타(star) 2013. 6. 5. 13:56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저자
박민규 지음
출판사
한겨레신문사 | 2003-08-1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늘 지기만 하는 야구, 삼미 슈퍼스타즈와 1980년대후일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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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베어스의 전기 우승으로 OB맥주의 판매량이 크게 증가했고,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들을 통해 프로 선수들의 플레이, 프로 선수들의 훈련 모습, 프로 선수들의 습관, 프로 선수들의 취미, 프로 선수들의 옛 모습, 프로 선수들의 출신고, 프로 선수들의 주특기, 프로 선수들의 징크스, 프로 선수들의 스캔들, 프로 선수들의 애완견, 프로 선수들의 좌우명, 프로 선수들의 애창곡, 프로 선수들의 나를 감동시킨 이 한권의 책과, 그들의 연봉이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열기는 '프로'라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가치관에 대한 열띤 토론과 찬사를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각계각층, 남녀노소, 신사숙녀, 지휘고하를 막론한 모든 이들이 <어느날 아침 눈을 떠보니 프로가 되어 있더라>라는 신앙 간증을 하게끔 만드는ㅡ 거대한 부흥회와 같은 성격으로 세상을 회개시키기에 이르렀다. 뭐랄까. 마치 지구를 역행시킨 슈퍼맨 처럼 세상을 눈 깜짝할 사이에 재구성해버린 것이다. 물론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으며, 산 안드레아스 단층도 무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82년의 여름은 그렇게 급박한 것이었다. 별 생각 없이 세상을 살아오던 사람들의 삶이 어느 한순간 아마추어와 프로의 분명한 기로 위에 서게 되었고, 그것을 느끼건 말건, 혹은 좋건 싫건 간에 분명한 선택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과연 슬기로운데다 신념과 긍지를 지님은 물론, 근면하기까지 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제 아마추어로 분류된 과거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으로 아마와 프로 사이의 38선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결론은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

아닌게 아니라 세상에는 속속 '땅 끝까지 전하라'의 성격을 띤 프로의 복음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예컨데 이런 것들이고, 한결같이 방송인과 지식인, 광고인과 경영인들의 슬기를 모은 것들이었으며, 과연 줄기찬 것이었다.

 

1. 이젠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당시 가장많이 회자되던 프로복음1호가 되겠다. 프로가 안 되면 아마 죽을 거라는, 최후의 통첩이 실린 무게 있는 복음이다.

 

2. 난, 프로라구요:과거의 삶을 회개하고, 앞으로는 잔업이든 휴가 반납이든ㅡ 아무튼 불꽃 같은 프로의 삶을 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뚜렷이 공고한 프로복음 2호 되겠다. 한편 당돌해 뵈면서도 목숨의 부지를 위한 비장한 각오와 잔잔한 애수가 서려 있는 복음. 과거 유신복음 중에는 같은 맥락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있다.

 

3. 프로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 아닙니까?; 주로 비열한 방법으로 목적을 이룬 자들이 내뱉던 프로복음 3호 되겠다. <동물의 왕국>을 인간의 삶에 적용시킨 친환경주의, 동물애호주의의 복음. 이 복음을 토대로 어쨌든 이기면 된다. 어쨌든 돈만 벌면 된다는 새로운 세계관이 빠르게 형성될 수 있었다.

 

4. 하루빨리 프로가 되어주게: 주로 회사의 상사들이 신입사원들에게 쓰던 프로복음 4호 되겠다. 쉽게 말해, 할 일이 태산 같다는 말이다.

 

5. 허허, 이 친구 아마추어구먼: 미전향 아마추어들에게 전도의 목적으로 쓰이던 프로복음 5호 되겠다. 가벼운 멸시와 조롱을 담아서 그들의 전향을 유도했다.

 

6. 맛에도 프로가 있습니다: 요식업계를 통해 민간에서 처음으로 창출된 프로복음 6호 되겠다. 거창한 문구로 위장해 있으나, 그 어원은 '옆집보다 우리 집이 더 맛있어요'라는 소박한 것이다.

 

7. 이러고도 프로라고 말 할 수 있나?: 주로 실수를 범한 부하직원에게 상사가 내뱉던 프로복음 7호 되겠다. 쉽게 말해. 나가 죽으라는 말이다.

 

8. 프로의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이다: 아직 멀었다. 더 높은 경지의 프로 세계가 잇으니 분발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프로복음 8호 되겠다. 주로 대학교수나 무슨 연구소의 소장이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최대 급소인 무식의 혈을 찌른 고급 복음이다.

 

9. 프로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 아마추어 음해와 더불어 야근의 생화화 고착을 목표로 한 프로복음 9호 되겠다. 이후 아마추어는 책임감이 없다는 사회적 무의식과 야근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기업 풍토가 널리 확산된다.

 

10.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한국 경제사에서 여성 고급인력의 필요성이 대두될 때 나온, 그러나 여성 고급 인력의 필요성과는 아무 상관 없는 프로복음 10호 되겠다. 역시 거창한 문구로 위장해 있으나, 그 원래의 뜻은 '옷 사세요'라는 말이다.

 

11. 프로주부 9단: 자칫 느슨해지기 쉬운 주부들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만든 프로복음 11호 되겠다. 주부가 앞장서서 살림도 프로로 하고, 애들도 프로로 키우라는 거시안적 포석이 깔린 복음. 승단 심사와 발표를 어디서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랬다. 불과 4개월 만에, 세상은 프로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나도 프로 중학생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의 귀가 시간도 눈에 띄게 늦어져만 갔다. 나도 이젠 프로란다. 지친 표정으로, 그러나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여 안심이란 눈빛으로, 어느날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내뱉으셨다. 누가 묻지도 않았고.

 

온 식구가 모여 카레라이스를 먹고 있던 저녁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카레를 먹다가, 문득 그런 말씀을 하신걸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또 그런말을 듣고도 다들 묵묵히 카레를 먹기만 했다는 사실 역시 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삼미슈퍼스타즈에 나오는 내용인데 다시 정리해봤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면 이 글을 다시 한번 꺼내서 보게 된다. 느리게 사는 것에 대해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긴 한데, 가끔은 인생에 이런 속도 조절이 필요하지 않나.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삶의 질을 높이고 싶은 욕망. 돈이 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 그렇게 내가 바삐 살아왔는데, 그 모든 것이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올 여름은 왜 이렇게 긴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비로소, 시간은 원래 넘쳐흐르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 무렵의 시간은 말 그대로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어서, 나는 언제나 새 치약의 퉁퉁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으로 나의 시간을 향유했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ㅡ돈을 대가로 누군게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앗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요새 내 상황이랑 많이 닮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