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연구소/스타의 습작 모음집 - OutsideCastle

안녕 클리셰

스타(star) 2016. 6. 24. 20:09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안국역 1번 출구로. 오른쪽을 보고 횡단보도가 나올 때까지 걷는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라임트리가 보이고 2층에 올라오면 내가 앉아 있지"


나는 새의 선물을 읽는다. 에스페란토어를 공부한다. mi amis vin.을 이제 막 쓸 주 알게 되었을 때, 중요한 의미를 깨달으면 나는 펜을 잠시 내려둔다. 머플러를 고쳐 매고 있을 때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거울 속의 네가 튀어 나온다.


"오랜만이네. 일단 좀 걷자"





우린. 삼청동을 걸으며 지금 부터 나타나는 네번째 가게에서 무조건 식사를 하기로 결정한다.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에서 약속대로 우리는 발길을 멈춘다.

크림 소스 스파게티와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를 시킨다. 너는 여느때나 밥먹는 시간이 한시간이 넘게 걸렸다. 가끔 내 먹는 속도를 쫓아오다가 체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 벌써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를 다 먹어치웠다. 네가 먹던 크림 소스 스파게티에도 포크를 들이 대본다. 

"이것도 먹어"

변한 것은 많지 않았다. 삼청동은 그대로 있었고, 인사동도 그대로 였던것 같았다. 웃음도 그대로였다, 변한 것은 조금 더 바보같아진 너의 헤어스타일 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머리 따위를 어떻게 한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니깐.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인지 시작인지 모를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덕성여고 앞에는 그 사이 돌길이 깔렸다. 걷기에 아스팔트보다는 이게 나았다. 

"술이나 한잔 하자"

오딧세이 8층에 간다. 걸어 올라간다. 언제나처럼 술을 소주, 안주는 맥주를 시킨다. 나쵸 한가지만 두고 먹어도 똑같다. 잔뜩 채운 소주잔을 맥주컵에 빠뜨린다. 포크로 10초 정도 저어주고 너와 나는 소맥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는 항상 소맥에 대해서 신기해 하곤했었다.

과거 분사형이 되어 버린 사랑에 대한 서로의 기억을 짜맞추고 싱크를 맞추어본다. 서로 약간 다른 버전이었던 두이야기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충하여 보다 조금 완전한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각자의 새로운 뉴스도 듣는다. 호기심 밝은 너와 나는 서로에 대해 많은 흥미거리를 읽는다. 나의 이야기는 논평을 읽는듯했다. 인생에 대한 덧없는 논평코너 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가쉽거리였다. 흥미롭지만 중요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대로 흥미롭게 우리는 서로의 신문을 읽는다. 

살짝 취한 것 같을 때 쯤 나는 너의 옆자리에 앉았다. 

"마주보고 있기 싫어" 

우리는 한곳을 바라보았다. 상계동에서, 노원에서 보낸 겨울에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렇게 앉아있었지.


"나가자"

약간 부자연스러운 너의 총총 걸음이 나를 즐겁게 한다. 내가 느꼈던 직감. 너에게 비치던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 한다. 언제라도 니가 갑자기 생에 대한 애착을 버릴까봐 걱정을 한다. 얘기를 하면서 그 언젠가 니가 종로 피아노 거리에서 피아노를 가르쳐 준 것이 생각 났다. 난 부지런히 뛰어 다니면서 발로 건반을 밟았다. 체르니 40번까지 내가 치게 되었을 때. 너는 사라져 있었다. 나에게 단지 노래 하나만 적어 갔을 뿐이었다. 

가난 했던 그 시절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너를 만나러 나올떄면 호주머니에 만원짜리 꼬깃하게 넣어서 데이트를 나서곤 했다. 그날 점심은 떡볶이를 먹고, 하루종일 걷기만 했다. 종로, 인사동, 대학로, 신촌을 걸었다. 서울 밖을 나가본적이 없었다.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내 마음 한 구석의 부채의식으로 남아있었다.


"세상에 가장 흔하지 않은 파란색이 있는데 그게 바로 크루저 블루베리야" 

인사동 무대에 앉았다. 어느새 손에 크루저 블루베리 두병을 쥐고 있다. 우리는 여유롭지 않았던 옛날을 떠 올리면서 한모금씩 파란을 삼켰다. 너도, 나도, 누구도 왜 우리가 이별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어짜피 서로 가난했다. 우리는 그렇게도 당연하게 그것을 받아 들였다. 너무나도 바람직하게 우리는 각자 본연의 삶에 충실하게 돌아가버렸다. 


"앞으로 우리는 잘해 봐야 삼년에 한번 쯤 스쳐볼 수 있을 거야" 

나는 온 몸이 유리로 되어 깨진 유리 소녀에 대한 동화를 들려주었다. 옛날에 온 몸이 유리로 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뛰어 놀다가 실수로 온몸이 부서지고야 말았다. 소녀의 부모는 깨진 유리 소녀를 정성스레 다시 붙였지만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모는 슬픔에 빠졌고 매일밤 기도를 드렸다. 결국 가엾게 여긴 하나님이 소원을 들어 주었다. 

"일년에 단 한번 생일날만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마침내 기다리던 생일이 되자 소녀는 긴 잠을 깨고 일어났다. 부모는 뛸듯이 기뻤지만 슬픔을 누리기보다는 소녀에게 최고의 하루를 선사하기로 한다. 유리소녀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놀이터에 나가서 놀기도 하고 쇼핑을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유리 소녀는 피곤했는지 침대에 누웠다. "엄마, 아빠 이제 주무세요." 부모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소녀를 위해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일년 동안 긴 잠에 빠져들었다.


alterego-T


처음 보는 듯이 소맥과 크루저 블루베리를 보고 너는 중요한 것을 암기하는 것 처럼 보고 또 본다. 마지 절대 잊기 싫어하는 것 처럼 주문처럼 외웠다.

"내가 널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잊지 않기 위해서란다." 

"나도 그래." 


다시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늘 그랬던 것 처럼 명동으로 걸어갈까 생각했지만, 오늘은 생각을 달리 하기로 했다. 우리는 전혀 반대 방향인 동대문 쪽으로 걷는다. 종로 3가, 4가, 5가를 지나면서 기억을 되짚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항상 걷고 있었다. 홍대에서 연희동까지. 연희동에서 이대까지. 매일 그렇게 걸었다.

동대문 MMC로 향했다. 나는 한편의 심야 영화를 끊었다. 무슨 영화였더라. 아 맞아 너는 영화를 정말 좋아했었어. 영화관에 올라가는 동안 슬픔이 조금씩 눈에 맺힌다. 그 동안 단 한순간도 너 앞에서 눈물을 보이거나, 너의 손을 놓아본적이 없었어. 


"우는 거야?"

하드 렌즈를 착용해서인가? 눈에 뭐 들어갔나봐. 

아쉬운 시간은 필름이 풀어짐과 함께 영사기에 흩어진다. 이제. 이 영화가 끝나면 다시는 또 너를 볼 수 없다. 주인공은 오토바이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골목을 달린다. 아쉬움에 팝콘을 한웅큼 쥐어본다. 나는 의자를 전부 펴고 반듯이 누워 버렸다. 조금씩 잠이든다. 이따금 뭔가 터지거나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면 난 고개를 돌려 화면 대신에 너를 쳐다 본다.  스크린에 비쳐 아른하게 보이는 턱선이 보였다. 그리웠던 옆모습이었다. 그렇게 예쁠수가 없었다.

잠깐 눈을 감는다. 그리고 이따금씩 눈을 뜬다. 목이 너무 마르다. 문득 뒤를 돌아 본다. 거울 속에 너는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아득하게 눈이 감기며 너에게 안긴다. 다시 졸음이 쏟아진다. 여긴 극장이 아니었던가. 네가 쓰던 향수와 손글씨 등을 생각해 본다. 왠지 이 영화가 끝날 것 같은 느낌. 이제 곧 크레딧이 올라올 것만 같은. 불이 꺼질 것만 같은.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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