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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엄마의 꿈은 뭐야?" - 대학생 엄마 만들기 프로젝트(1)

스타(star) 2014. 6. 22. 19:33

프롤로그

어머니의 연세는 올해로 55세.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많이 늦은 나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이제 완벽히 집의 기둥이 되었다. 아들 둘이 생활비를 벌어들이기 시작하면서 어머니는 지긋한 노동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었다. 경제권이 부모에서 자식으로 옮겨간 것도 의미 있었고, 그 만큼 어머니의 여가 시간도 늘어났다.  

우리는 그 동안 고생했던 어머니에게 어떤 선물이 가장 좋을까 생각해왔다. 해외여행, 명품가방, 자동차 등등 많은 것들을 생각해봤는데 우리는 그 동안 우리가 생각한 것들 중에서 가장 색다르고 즐거운 것을 선물하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대학생활이었다. 추억을 선물한다는 것이었다. 초졸이 최종학력인 어머니에게 대학생활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몇 년 간의 노력 끝에 우리 가족은 목표를 달성했다. 어머니가 14학번 실용음악학과 대학생 새내기로 입학하게 되었다. 학기 초에 어머니는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하고, 전공 교수님과 미팅하고, 강의 듣고, 교재 구입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 버렸다.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그 동안의 과정은 고통스럽기도 하고, 만학도 부모를 둔 자식의 관점에서는 참 흥미롭기도 했다. 그 동안 무슨일들이 있었는지 썰을 좀 풀어볼까 한다.


실용음악학과 합격자 조회 순간.


어머니가 대학 O.T에 참석하고 가져온 것들.



대학 학생증. 61. 09. 15는 어머니의 생년월일. (어머니는 실제 생일과 주민등록상 생일이 조금 다르다)



학교 M.T가서 받아온 단체 과잠바.




대학에 입학한 어머니와 긴 대화를 했다. 그 동안, 우리 가족들이 얻은 경험을 잘 정리해서 기록해 두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고 희망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최종 학력 초졸

사실, 그 동안 어머니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어머니가 고향인 강원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때가 70년도니까, 이후로 거의 40년을 초졸로 살아왔다. 어머니는 항상 공부와 지식에 목말라 했던 것 같다. 때때로 하던 일이나 사업이 잘 풀리지 않으면 입버릇처럼 "내가 고등학교만 나왔어도"라는 말을 해오곤 했었다. 자식으로써 이런 패배감 섞인 말을 듣는 것은 꽤나 고통스러웠다. 

사실 요새는 널린게 대학생이라서 새롭지 않지만 우리 부모 세대만 하더라도 대학 나온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보통은 집안에 첫째나 아들들만 가르쳤다. 공부라는 것은 많은 자본이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에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으로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가급적 성공가능성이 높은 자식들에게 몰아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집안에 일하지 않는 인력이 있다는 것은 굉장한 손해였을것이다. 한학기 등록금이 소 한마리에 육박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공부에 뜻이 있기라도 한다면 집의 기둥을 박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의 외갓집. 그러니까 어머니 쪽의 가족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베이비붐 세대들이 다 그렇듯이 어머니도 형제가 6남매였는데, 외할아버지는 아들들만 교육시켰다. 어짜피 딸들은 출가외인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심지어 작은 이모는 초등학교도 입학을 시키지 않을 뻔 했는데 어머니가 입학식날 작은 이모를 데리고 학교에 가서 입학을 시켰다고 하니 당시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는 그 부분에서 수 십년동안 외할아버지와 감정대립을 해왔던 것 같다. 어머니는 고향에서 미싱 기술을 배운뒤에 서울로 상경하고 독립해버렸다. 어렵게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동생들을 모두 서울로 불렀다. 형제들 뒷바라지 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공부도 점점 늦춰질 수 밖에 없었다. 


 

야학에 대한 추억 

어머니는 서울로 와서 경제적으로도 자립하고, 아버지와 결혼도 하고, 나와 내 동생도 나오고 그러는 동안은 공부를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유치원에 다니고, 동생은 어린이집에 맡길 정도가 되고 나서 슬슬 묵혀놨던 공부를 다시 시작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은 편이다. 특별하지 않은 기억들도 잘 생각해내곤 했다. 내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중에 기억 나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90년도 어느 즈음이었던 것 같았다.

한창 꼬마였던 나는 어느 날, 엄마를 따라서 저녁에 낡은 빌딩에 따라오게 되었다. 2층인가 3층 줄 알았는데 나중에 어머니랑 이야기를 나눠보니 거기가 지하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다닌 야학이 2곳이라서 기억이 헷갈리는 것 같다. 그 곳은 교실인지 강의장인지 모르는 곳이었는데, 그 독특한 풍경에 어리둥절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나에게 여기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배움의 기회를 놓쳤던 사람들을 위해서 생겼던 야학이었다. 

주변에는 어머니 정도 나이 되는 분들도 있었고, 더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연령대가 굉장히 다양했던 것 같다. 검은 칠판에는 어떤 교사분이 칠판에 필기를 하고 있었고, 워낙 조명이나 시설이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이 들었다. 어린 나는 그것이 무슨 비밀 집회와 같은 느낌이었다. 뭔가 사람들도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것에서 수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어느 날은 내가, 또 어느 날은 나보다도 더 어린 내 동생이 그 낡은 빌딩에 따라가곤 했다. 

선생님이 필기를 하고 나서 칠판 지우개로 한번씩 지우는데 분필가루가 날리곤 했다. 저녁 늦은 시간이었는데 저는 창가에 매달려서 밖에 길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금방 끝나는게 아니었다. 문득 지루해져서 어머니를 쳐다보면, 앞에 선생님의 필기를 부지런히 적던 모습이 생각나곤 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집에 언제가냐고 칭얼대기도 했는데, 그래도 뭔가 중요한 걸 하는 느낌에 뗑깡을 많이 부리지는 않았다.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과학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개구리 해부하던 그림이 있었다. 아무래도 어린시절에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그림인 것 같아서 기억이 나는 것 같다. 이게 중학교 과학시간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내가 중학교에 올라가고 똑같은 부분을 공부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나중에야 알게된 사실이지만, 나보다도 더 어렸던 동생은 이 광경을 아버지에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매일 저녁에 이상한 곳에 간다고 말했던 것 같다. 하긴, 다섯 살 정도 된 동생의 관점에서 야학은 이상한 곳이었다. 내 동생의 말에 오해한 아버지는 내 동생에게 거기가 어디냐고 물어서 찾아간 모양이다. 그 당시 어머니의 증언으로는 입구에서부터 아버지가 다짜고짜 "여기 뭐하는 곳이냐"면서 깽판을 부렸다고 한다. 

나중에야 거기가 야학이고 어머니가 그저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긴 했지만, 어머니는 이후로 그 상황이 부끄러워서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