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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는 만들지 않는다" - 과거와 결별하는 방법

스타(star) 2013. 10. 22. 02:52


강남 트라우마

오늘 책상을 책상을 정리하다가 잠깐 예전에 잊었던 걸 찾아냈다. 거래명세표인데 이게 뭐냐면, 예전에 내 하루 술값으로 쓴 흔적이다. 정확하게 술값 165만원에 수수료 7800원 합해서 165만7천8백원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러려니 할 수 있는 돈일 수도 있지만, 당시 내 나이에 저 금액의 술값은 적은 액수는 분명 아니었다. 또는 여럿이 함께 마신 거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텐데 아쉽게도 그런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나 혼자 마신 술값이고, 나는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했다. 

잠깐 이 때를 회상해 보자면, 한창 무기력증을 앓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원하던 목표를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3년간 만난 여자친구와의 이별, 파탄나버린 교우관계, 끝없는 고독에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들이 흔히 말하는 방법대로 살아보았다. 열심이 청약적금 넣고, 한푼두푼 저축해나가는 그럼 삶 말이다.

열심이 일한 덕분인지, 운이 좋은 덕분인지 몰라도 드물게 스톡옵션도 받았다. 당시 내가 가지고 싶은 것들이라고 해봐야 고작해야 게임기나 캐논 350D 카메라 따위의 소소한 물건들에 불과했을 때다. 필요한건 다 사봤고, 갖고 싶은 것들도 다 하나씩 사고 팔아보니 필요한게 없었다.

나이에 비해서는 적지 않은 돈을 모았지만, 쓸 줄을 몰랐고,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모르던 시절이다. 세상은 이제 나에게 뭘 해야된다고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 같다. 누군가의 지시나 시켜서 하는 것이 익숙했던 나에게 주어진 자유는 어려움 뿐이었다. 도대체 이젠 내가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뭔가 인생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답답한 기억에 오늘은 좀 마셔야 겠다고 생각하고 강남으로 갔다. 혼자서 양주를 3병이나 마시고, 덤탱이까지 더해져서 하루 술값으로 170만원인가 썼는데 양주에 약을 탔는지 어떻게 계산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기억 나는 것이 가게 기둥 서방같은 사내가 와서 계산해달라고 했던 거랑, 경찰을 부르려고 했는데 핸드폰이 전혀 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가씨는 양주를 통째로 얼음통에 엎어놨다. 어쨌든 집에 오긴 했는데 머리가 너무 아파서 하루를 그냥 누워만 있었다. 애꿎은 전 여친에게 전화해서 하소연하곤 했다. 뭐 그 영양가도 없는 위로가 받고 싶었나. 그 만큼 상심이 컸다. 


발상의 전환

보통은 그냥 그렇게 손해 입고 피해 입고 끝나면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것이 정상이다. 어느 누가 그런 끔찍한 사고의 순간, 배신의 순간을 떠올리고 싶어 할까. 하지만, 나는 고통을 마주할 용기를 냈다. 생각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이다. 일단, 당장 입은 손해에 대해서는 명백히 내 실수로 규정했다. 그리고 나서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다시 복기 해보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비슷했다. 

모든 것은 무지에서 온다. 강남에 주점들이 주대가 얼마고, 룰은 어떻고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냥 정확히 호구로 보였던 것이다. 평소에 놀러를 자주 다녀본 것도 아니고, 특히나 이런 문화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서 어설퍼 보였을 것이다. 아마 그리고 이번에 크게 안당했다면 앞으로도 엄청나게 손해를 봤을 지도 모른다. 

몇 가지 행동이 즉각적으로 이뤄졌다. 첫 번째. 속상하기도 하고 짜증나서 명세표를 찢어버렸으나 바로 생각을 바꾸고 다시 테이프로 다 붙여서 한 동안 이걸 이렇게 지갑에 넣고 다녔다. 그리고, 회사 책상에 가장 잘 띄이는 첫번 째 서랍에 넣어두곤 했다. 이직을 해도 그대로 그 위치에 두었다. 계속 잊을만 하면 상기시키곤 했다. 또한, 그렇게 마주할수록 자신있었다. 뭐 이정도는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는 오히려 수업료 치고는 싸게 끝났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번째. 그 때를 계기로 열심히 대한민국의 밤문화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됨. 수 많은 고수들의 정보. 그리고 구장별 특징들을 분석하고 가격이나 문화에 대해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필요하면 다시 방문해 보기도 했다. 한번 그런 안좋은 기억이 있는 장소에는 다시 방문하는 것 조차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한두번 뿐이다. 나는 공포와 싸운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한번 피해를 입어봤기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내 학습은 빨랐다. 



트라우마는 없다.

솔직히 좋지 않은 경험을 다시 꺼내고 또 소재 자체도 좋지 않은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누구나 이런 류의 공포나 트라우마가 한번 씩은 있다. 내가 여태 곧게 살아왔고, 절대 이런 일에 휘말릴 일이 없을거란 단정은 짓지마라. 내가 직접적이 아니어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도 있고, 이와 유사한 형태의 일이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여러분들이 사는 세상의 절반은 무법, 위법, 불법의 세계이다. 적어도 내 생각엔 아직 합법이라는 테두리가 여러분들을 완벽하게 보호해주지 못한다. 

나는 이 때 겪은 경험이 워낙 신선해서 나 자신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름 적지 않은 돈을 잃었을지 몰라도, 그 때 나는 가장 어둡고, 암울한 이 세계의 또 다른 면에 대해서 비로소 이해를 하게되었다. 강남의 오피스텔 집값, 오피스텔 투자자들, 술집 아가씨들, 마담, 콜때기 기사, 야간에 열리는 미용실, 호스트바, 허영심,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진실, 돈의 본질, 현금의 흐름, 지하경제, 조직폭력배, 이권다툼 등등에 대한 생태계와 기생/공생 관계에 대해서 심도있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런 것은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고, 어딘가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도 않다. 가장 빠른 형태로 변화하고 항상 새롭게 업데이트 되고, 법망을 피해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내 원칙은 그렇다. 한번 겪은 공포와 단점은 우리에게 좋지 않은 과거로 남게 된다.

이러한 과거와 가장 쉽게 결별하는 방법은 바로 "잦은 노출"과 "마주함"이다. 물론, 고통스러운 기억일 수도 있겠지만, 그 기억과 상심은 오래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이 파고 들어서 편안하게 느낄 정도까지 경험하면 자신감으로 바뀔 수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우리가 배우지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두운 것이든 밝은 것이든 간에. 물론, 그 것을 아예 떠올리지 않고 수면 아래로 감추는 방법도 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할 수 있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