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오늘의 항해일지

고독한 남자는 야구장에 간다 - 잠실야구장 20141004

스타(star) 2014. 10. 4. 21:08

홈경기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야구에 빠져 살았었다. 1년에 엘지가 홈경기를 한 66경기 정도 하는데 그 해 내가 모은 야구장 티켓이 50장도 넘었던 것 같다. 홈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평일이든 주말이든 안 가리고 거의 매일 가다시피 했다. 

야구경기 일정에 맞춰서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부산으로, 목동으로 참 많이도 돌아다녔었던 것 같다. 선수들의 응원가를 하도 많이 듣다 보니까, 이제는 타팀 선수들 응원가도 외울 지경이었다.

그 때는 여자친구도 없었고, 일도 재미없고, 뭔가 인생에서 오랜만에 잉여로운 시간이 넘쳤다. 몇 년간 앞만 보고 달려와서 그랬는지 몰라도 정말 오랜만에 무엇인가에 빠져들어서 몰입했던 것 같다. 


엘지트윈스

하필 또 엘지팬이었던 것도 문제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우연히 친구 따라 함께 간 야구 경기가 엘지 경기였다. 덕분에 평생 엘지 팬이 되어 버렸다. 머리 휘날리면서 세이브로 막아주던 이상훈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날 역시 수 많은 야구 경기 중에 하루였겠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날이 되어버렸다.

대학 때도 마음만 야구장에 있었을 뿐이지, 경기는 단 한번도 가지 못했다. 그냥 야구를 잘 못한다는 소문만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엘지는 10년 동안 가을 야구를 하지 못했는데, 해마다 가을이 될 수록 나의 기분도 엘지의 성적처럼 함께 떨어지곤 했다. 

이십대의 가을은 몇살 일까? 스물 일곱에서 스물 여덜 살 정도 되려나? 지금도 가을의 마지막 경기 들이 기억나곤 한다. 


잠실로

오늘 느즈막히 일어났는데, 오늘 뭘 할까 하다가 오늘 경기가 잠실에서 열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술 생각이 났다. 가을인데, 혼자 술 한잔 먹을 일도 없었다. 

야구장에 가서 오늘 가을 바람 쐬면서 술이나 실컷 먹을 생각하니 갑자기 재미있을 것 같았다. 유니폼과 유광잠바 풀세트로 챙겨서 나왔다. 지금 출발하면 늦어도 2회 쯤에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쏘주를 사서 들어가야지. 사실 경기장에는 주류 반입이 불가하다. 미국 일본에서도 경기장에 들어갈 때 소지품 검사 하지 않나? 우리나라는 그런 것 없다. 수 많은 관중들이 들어가는데 폭탄을 가지고 들어가도 모를거다 아마. 그러니 맨날 아재들이 술 먹고 경기장 높은데 올라가고 그런 사건 사고들이 끊이질 않는 것 같다. 


야구장 가니 암표상들이 달려들어서 표를 팔려고 했다. 사실 부담스럽게 하지만 않으면 천천히 알아보고 암표를 살수도 있었을 거다. 자리가 얼마인지 시세는 얼마인지 좀 알아보고 사려고 했다. 그런데 너무 막무가내로 잡아서 팔아버리려고 한다. 

너무 귀찮게 하길래 한마디 했더니 암표 장사꾼들이 도리어 화를 낸다. 티켓 현장구매에서 알아보니 갈 곳이 없었다. 외야로 가야 할 지경이었다. 아까 암표 장사꾼이 팔려고 했던 자리도 나쁜 자리가 아니었다. 다시 돌아갔다. 아까 시비 걸었던 암표상에게 가서 표 한장 주세요 했더니, 이 아저씨가 자존심을 부린다. "당신한테는 안팔아." 세상에 자존심 챙길거면 암표장사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외야 한장 끊어서 들어갔다.

오랜만에 넓은 그라운드를 보니 속이 다 시원하더라.



식도락

야구장가서 밖에서 파는 김밥이랑 소주 한병 사들고 왔다. 홈런볼이랑 먹으면서 야구 보는데 이거 완전 천국이었다. 계속해서 먹는다. 야구장에 다니면 살이 찐다. 야구장은 식당이다.



오랜만에 박용택 응원가도 부르고, 이병규 응원가도 부르다 보니 경기는 어느새 야간으로 접어들었다. 






길가는데 어린이 들에게 인기가 많은 팀웍이.


안주 떨어져서 밖에 나가서 닭꼬치 사왔다. 예전에 없던 안주거리였는데 이거 매운맛 먹으면서 야구보니 야구가 경기에 잘 들어오질 않더라. 

이거 찍는 순간 경기 실책 나와서 역전 당함.



소주만 먹었더니 목말라서 맥주도 사왔다. 술은 소주, 안주는 맥주. 소주 다 마셔서 나가서 한병 더 사옴. 기념으로 셀카도 한장.



경기 끝
술 먹고 이제 본격적으로 취하기 시작했다. 
경기고 뭐고 그냥 졸려서 옆에 난간 기대고 잠들었다. 누가 깨워서 일어나보니 경기는 끝이 났고,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갔는지 야구장은 텅 비었다. 올해 첫 직관은 패배했다. 


나오는 길에 샵존에 들러서 모자 하나 구입하고 왔다. 술먹어서 그런지 내가 뭘 산 건지도 모르고 그냥 기분에 허전해서 하나 사온 듯.

야구장에 가면 사람들이 많아서 좋다. 뭔가 하나로 된 기분도 들기도 한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고 불이 꺼진 경기장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데 뭔가 기분이 싸하다.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게 이건가 보다. 

가을 공기 속에 들려오는 응원가가 어딘지 모르게 쓸쓸히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