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오늘의 항해일지

당신의 행선지

스타(star) 2015. 8. 4. 04:04



1. 

몇 주나 집을 비워두었더니 생활이 다 이그러졌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중심 잡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매주 새로운 풍경과 새로운 환경을 만나고나니 뭔가 자꾸 쌓이기만 하고 도대체가 정리가 되지 않더라. 잠시 쉬어가는 페이지가 필요할 것 같다. 다음의 더 큰 파도를 넘기 위해서는 지금 한숨 푹 자두어야 한다. 처음으로 여행작가 일이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그 사람의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법을 누가 물어왔다. 이틀을 생각했는데 떠오른 야심찬 답변이었다. 간단해요. 바로 그 사람과 멀어지면 되요. 가까워지는 만큼 그 사람의 많은 것을 알게 되니까 멀어질수록 그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까먹겠죠. 그 중에는 알고 싶어지면 가까워지면 되고, 모르고 싶어지면 멀어지면 되요. 아니면 죽을때까지 거짓말 하라고 하세요. 밝혀지지 않으면 영원한 진실이 됩니다.

조금 희미해질 뿐이다. 사랑 하지 않을 때는 그런 것이 가능했다. 나와 상관 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으니,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여길 수 있다. 정말로 관심 없는 것에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수 많은 여우들 속에서 내가 길들인 여우는 조금 다르지. 내 여우가 조잘 대는데 그런 것들이 내게는 충분히 상처가 될만했다. 마음의 준비 또는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 쏟아져 내려온다. 나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너 지금 멘탈로 극복이 가능하니. 


3.

그녀는 완벽했다. 단 한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화장을 했다. 몇 년 뒤에야 겨우 그녀의 머리가 가발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 꽤나 당혹스러웠다. 이렇게나 오랫동안 속아 왔었던 것에 감탄했다. 또, 그녀의 완벽함에 경탄했다. 사실 의심은 꽤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 나는 뭔가 거짓이라는 것과 꾸며낸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모습도 꾸며낸거야. 미소도 지어낸 거고, 그러니 쌩얼을 보여주지 않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졌다. 


의사와 나는 하루 종일 그녀의 가발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것에 대해서 나는 차마 지적을 할 수 없었다. 용기가 없었나. 의사는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한번이라도 물어볼 수 있지 않나요? 조금 더 알아봅시다. 이야기 하곤 했는데, 사실 이런 문제와 상관없이 뭐때문인지 몰라도 꽤나 오래전부터 마음을 다쳤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사람에 대해서 절대로 믿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스스로도 못믿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이 계약과 거래였던 것 같다. 그나마 조금 믿었는데 그러니 뒤통수가 얼얼하지.


4.

사실 이렇게 피해자 코스프레 열심이 한다해도, 나도 내가 잘 아는데 무감정할 때는 진짜 무감정한 사람이다. 필요할 때만 얍삽하게 이용한다. 아니 나름 포커페이스를 잘해놓고 필요한 순간에 시원하게 뒤통수를 치곤 했다. 나중에야 들었지만 진짜 개처럼 차인 그녀의 입을 빌리자면 진짜 시발 해도 이건 너무 하는거 아닌가 할 정도로 욕이 절로 나올 정도로 짜증 났다고 한다. 술을 처먹고 자빠져있던, 자살 소동을 벌이던, 감성에 호소하건, 어린 조카를 동원하던, 몸을 팔러 나가던 이러니 저러니 앓는 곡소리를 들어도 나는 미동조차 안했다. 사실 내가 개탄스러워 할 이유는 없다. 어짜피 사람 모두 쌍방과실이다. 한 떨기의 꽃을 피우기 위해 희생된 낙엽들을 신경이나 쓰겠나. 다  지 감정만 충실하지. 


5.

어느날이었나. 버스가 영등포쯤 지났다. K에게 전화를 건다. 오랜만이야 잘 지내니 따위와 같은 식상한 멘트 좀 치려는데 갑자기 남자 목소리로 바뀐다.야 씨발 너 뭐야. 아 네 K 남친 아니 전남친입니다. 야 나 K 남친인데, 너 좃같은 새끼야. 앞으로 전화하지 마.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한번만 더 전화하면 뒤진다. 그래요, 아참 남친님. 참고로 깨끗하게 썼어요. 끊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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