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오늘의 항해일지

정리. 정리.

스타(star) 2016. 6. 1. 02:08

1.

불안했었다. 반대를 한다고? 집단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슬픔은 누구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믿을 사람은 그녀 밖에 없었다. 모두가 반대를 한다해도, 그녀만이라도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겠다고 한다면 전부 감수할 수 있었다. 설득 할 자신이 없단다. 부모가 끝까지 반대한다면 나 대신 부모를 선택하겠다는 말에 모든 것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 내가 무얼 믿고 가야하나. 내가 믿을 것은 너 하나 밖에 없었는데, 네가 만약 너희 가족들을 선택한다면, 우리가 가정을 이루는 것은 포기하겠다는 것이 아니냐. 이 모든 것을 나는 내 존재가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시작 된 것 같다. 불안이 곧 모든 것을 망친다. 100%를 추구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다. 불안에 대한 숱한 물음과 강박이 나은 비극의 산물이다.


2. 

겉으로 봤을 때는 불안이다. 하지만, 불안의 이유를 더 들여다 보자. 

그래? 반대의 그 이유가 대체 뭔데? 아빠가 없어서요. 그게 이유야? 세상에 저들이 좋아하는데 그런 이유라면 너도 그만둬. 안그래도 부모 없이 자라서 서러운데 그걸 또 그렇게 상처를 주나. 그런 반대는 처음이라 나도 당황했고, 통째로 내 삶이 부정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겪었다. 아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서 불안이 커졌던 것 같다. 자꾸만 반대할 것 같은. 결국엔 끝이 안좋게 끝날 것만 같은 그런 불안한 날들이 계속 되었다. 그러한 스트레스가 강박사고로 이어지고 그 뒤로 계속 물어보게 되었던 것 같다. 완벽을 추구하려는 그놈의 성격 때문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뭘 어떻게 잘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오늘을 기점으로 완전 바뀐 것 같다. 상황은 어떻게 되든 잘 모르겠고, 나는 어떻게든 강박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나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던 것 같았던 것 같다. 그걸 또 이겨내려고 했는데 그런 것에 역성내는 내 모습을 보고 또 실망하곤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나 필요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뭔가 잘 되려고 할 때의 이야기이다. 이제 오히려 잘 안되려고 하다보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짜피 인연이라는게 올 사람은 오게 되어 있고, 갈 사람은 가게 되어 있다. 헛된 힘 빼봐야 소용 없고, 흘러가는대로 사는 것이 순리인 것 같다. 그냥 또 한번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다. 여자를 너무 믿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기대했다. 이번엔 진짜라 생각했던 내 판단이 무언가에 홀렸던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어쨌든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사랑을 거두니 편해졌다.


3. 

다시한번 말하지만, 난 기독교를 싫어하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신이 있다고 믿는 유신론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는 불만이 있다. 그것은 어찌보면 교회의 역할은 이런 것이고, 교회는 이런 모습을 지녀야 한다는 나의 도덕적인 강박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더욱더 원리주의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라이스 크리스천. 종교가 어떻게 현세적 나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가. 어떻게 헌신해야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취할 수 있는가 처럼 종교를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사실 우리가 겪는 갈등은 대부분 사람과 사람의 문제인데, 그들과 진솔한 대화를 한번 나누기 보다는 기도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왜 내가 그렇게 교회 다니는 사람에 선입견을 가지는가. 개인적 실리주의와 결합한 한국교회의 전형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로 바뀌지 않으려고 한다. 이 시대의 구복신앙이 곁들어진 한국 교회와 라이스 크리스천들의 한계인 셈이다. 

이들은 위로받는 기도만 원할 뿐이고, 씨름하는 기도는 하지 않는다. 거친 세상의 풍파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과 십자가 아래 편안히 누워 쉼을 취하려고만 한다. 예수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기도 인생과 씨름하면서 나아가야 하는데 말이다.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오히려 내 인생과 모습을 사랑해야하지 않을까. 강박적인 그들의 모습은 자칫 그것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비쳐질수가 있다. 그들은 경건 생활을 계획하고, 탁월한 사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주고, 가진 것을 모두 벗어 가난한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기본중에 기본인데, 과연 어디에서 속물성이 더해진 것일까. 

이런 비정상적인 강박주의를 부추기는 사회.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보여야 한다는 교회의 궁합이 너무 무섭다. 

정작 예수님의 일생은 서른 넘도록 결혼도 못했고, 일용직 노동자에, 기득권을 비판하다 처형당했는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가장 혐오하는 인물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일생과 너무나도 닮았다.

 

 

4.

차근차근 나 자신을 되돌아 본다. 불안, 그리고 불안에 따른 강박. 분명 이유는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조급해 할만하다. 하지만, 그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완벽한 사윗감을 찾는 세상의 세태에 나는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이런이런 사람이어야해 라는 정답을 정해놓고 그걸 강요하는 사회가 과연 정상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얼마든지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의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린 절대 산업화를 뚫고 살아온 부모들의 기대를 맞출 수가 없다. 그들은 95, 98에서 이제 됐다라고 하지 않는다. 100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강박을 부추기는 사회이다. 우리의 발전을 이만큼 거두게 되었지만, 회색을 용납하지 않게 되었고, 이분법적인 세계와 자신의 생각이 오로지 옳다는 편견적인 세상이 되었다. 난세에는 그러한 리더쉽이 필요하지만, 이 문제는 사회가 안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드러나게 된다.

 

5.

다소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기로 했다. 이 쓸데 없는 생각들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같이 호흡하는 것 조차도 싫어질 지경이다. 더욱더 대한민국의 여자를 못믿게 되고, 더욱더 이 나라가 싫어져 가는 것 같다. 벌써 이런저런 자리들이 만들어 진다. 이거 다 속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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