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오늘의 항해일지

새출발.

스타(star) 2016. 8. 30. 12:42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생활이 일상이 되었다. 자기 제어를 하지 못했던 지난 날의 나를 보면 참 그 땐 왜그랬을까 생각하곤 했다. 

난 이기적 이었다. 내색조차 하기 힘들었다. 너의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었어. 사업도 잘되었으면 좋겠어, 나중에 유학도 꼭 가보고 싶어, 건강도 잘 챙겨야해. 나 이제 결혼도 준비해야해 이런식의 고민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감당을 못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은 내 욕심이었다. 힘들면 하나씩 내려놓고, 조금씩 쉬고 그때마다 되돌아보고 그랬어야 했는데 내가 나를 잠시 세우지 못했다.




1. 

아버지가 너무 그리웠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하나요. 지금 제가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뭘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요. 

그 동안 너무 태연하게 여기까지 누구 도움 없이도 잘 살아 오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안계시다는 이유. 그것에 순간 흔들렸던 것 같다. 한번 벌어진 상처가 아물지를 못했다. 속으로만 앓고 너무 힘들어 하고 있을 때, 체육관 관장님이 집에 데려다 주시면서 참 많이 위로를 해 주었다. 자네가 참 부모 없이 살아온 것도 서러울텐데. 맞다. 돌이켜보니 20년 동안 난 그 슬픔을 미뤄놓고 있었던 것 같다. 

열 세살 때 아버지 장례식장에도 눈물 한방울 안흘렸다. 처음 받아들었던 가장이라는 타이틀의 무게는 정말 너무나도 무거웠다. 열 세살의 내 나이에는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난 그 때 여렸고, 나약했었다. 성격도 조용해서 앞에 나서지도 못하던 아이였다. 슬픔을 꾹꾹 참았다. 너는 어떻게 된게 눈물도 없냐고 했지만, 그럴수록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  

비슷한 상황의 친구들이 결혼할 때가 되니 모두 한번씩 상대 부모들로 부터 매몰차게 거부를 당했다. 한부모 가정이라는 이유는 친구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줬다. 극복하지 못한 친구들은 한국에 대한 정 자체가 떨어져서 해외로 떠나거나, 결혼에 대한 생각 자체를 접어버렸다. 누구보다 열심이 살았던 친구들이지만, 다들 그 부분에서 고통스러워했고, 그것은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서로 믿고 의지하던 친구들이 해외로 나가버리니 나 역시 외로움이 더 커져갔다. 

너무 허해서 오랜만에 성당에 갔다. 오죽했으면 성당과 교회를 못나가는 이유가 주기도문 때문이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이 구절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갑자기 펑펑 울음이 터져나왔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인지, 이겨내지 못한 나 스스로에 대한 자책인지 모르겠다. 나 사실 말은 못했지만, 내게는 너무 큰 충격이었고, 내게는 너무 큰 상처였어. 열세살의 나는 아버지가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 아버지가 없더라도 잘 살 수 있어 라고 줄곧 생각해온 것 같다. 그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도록 노력해왔고, 정말로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울면 다른 사람들이 다들 너무 슬퍼할거라고 생각하고 잘 버텨왔다. 갑자기 서른 셋이 되어서야 내게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날 하루 열세살의 중학생이 되어 실컷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힘들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살아왔는데 이걸로 또 힘들어 하면 안되지. 힘을내자. 그렇게 다시 다짐하고 거울을 보고 나니 많이 성장했다. 이제는 다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나 정말 잘 살아왔고, 열심히 살았으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면 아마 다들 이해할거라고. 아직 나를 만나보지 못했고, 나를 겪어보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용기를 얻었다. 나중에 아빠도 나 보면 그 동안 잘했다고 해줄 것 같았다. 꼭 엄마랑 동생이랑 그 동안 잘 지냈다고 이야기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서야 정말로 내가 아빠와 이별을 말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톡 여행을 하면서 단체여행을 온 어르신들과 많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동안 내가 어른들을 너무 어렵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어머니, 이거 와인인데 모스카토 다스티입니다. 아버님 골프가 정말 재미있는 운동이더라구요. 정말 여행 내내 너무 날 잘 챙겨주고 누구 하나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결국엔 자식들 걱정이었다. 취업고민, 아들이 만나는 여자친구, 자식들 학업, 그 다음이 자신들의 노후 걱정이었다. 부동산 재테크와 보험상품 등등에 대해서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자들과 같이 찍은 사진 보여주면서 어머니 자식들 취업 어려우면 제 사무실 한번 보내세요. 얼마든지 상담 해드릴게요.

어머니 한명이 번호를 가져가더니 옆에 있던 어머니들이 전부 번호를 가져갔다. 맞아 나는 원래 이렇게 공감을 잘해주는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가 여태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 한번도 냉정하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맞다. 그 때는 내가 너무 자신이 없었다. 주눅들고 내 상처 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었다.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지 못했고, 솔직해야 했을 때 솔직하지 못했다. 괜찮지 않았는데, 괜찮다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너를 위해 그렇게 이야기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히려 나를 파괴하는 것인지 몰랐다. 

그 동안 너무 슬픈 이야기에 내가 현실을 피하고 극복하려하지 않았는데,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 하게 해 준 셈이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제가 그 때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지만 그건 이미 늦었다.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이제는 정말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2.

동업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지분을 정리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 순간은 너무 암담했다. 연인과의 이별,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또 동업자와의 이별, 정상인으로 살아가기가 더 힘들었다. 그 과정을 전부 글로 적기에는 부족하고, 물리적인 아픔으로 묘사하자면 어제는 왼쪽팔이 잘려나가고, 피 흘리는 상황에서 오늘은 오른쪽 팔까지 잘려나간 느낌이었다. 그 정도 되니 아프다는 생각 조차도 안들었다. 비명 지를 힘도 없었다.

고민에 빠져야하는 그 시간이 너무 외로웠고, 힘들었다. 물론 지금까지 어려움 잘 이기고 살아왔기에 어지간하면 눈도 깜빡 안하지만 이렇게 연속적으로 터진 적은 없었다. 잘 되갈 때는 다 옆에 오더니 어려워지니 다 떠나네 하는 생각도 들곤 했다. 말로 하긴 참 어려운 문제이지만, 파트너도 그동안 참 힘들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사업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고, 파트너는 새로운 인생을 꿈꾸고 있었다. 절박함에 이끌려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배 안에서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 취하지도 않더라. 

돌아오는 길에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각자의 갈길이 분명해진 다음에는 오히려 더 파트너를 위해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형,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정작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꿈을 위해 노력 하라고 이야기 하면서 정작 우리의 꿈을 미뤄 두지는 말아요. 형도 하고 싶은 꿈을 꼭 이루기 위해 도전 했으면 좋겠어요. 파트너는 20년 전부터 하고 싶었던 작곡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르기로 했다. 번번히 공부를 하다가 멈추는 모습에 나도 많이 안타까워하곤 했다. 이 나이에 할 수 있을까? 형. 우리 어머니를 봐요. 지금 그 나이가 되어서도 하고 싶은 꿈을 위해 살고 있는데, 제가 도와 줄게요. 핑계거리를 찾지말고, 하고 싶은대로 저질러버리고 차라리 고통을 받아들입시다. 제 옆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거 못 이룬 사람은 없습니다.

지분을 정리하고, 오히려 잡다한 것 까지 전부 가격을 쳐서 정리해주기로 했다. 내가 필요한 것들은 그냥 내가 자비로 지불했다. 평상시에는 그렇게 계산을 따지고 오백원도 나누었지만, 이번만큼은 따지지 않았고 파트너의 계산대로 계산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동안 함께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웠고 고마웠다. 

형 어려우면 나중에 돌아와도 되요. 사업은 나 혼자 감당 못할 정도로 키워둘 테니까. 아니야. 이렇게 빚 까지 내서 공부하는데 이번에는 꼭 해내야지. 



3. 

왜 공부를 시작했지? 사실 스무살 때 부터 나는 유학을 가고 싶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동안 내 인생을 나를 위해 살았다기 보다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왔기 때문에 유학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 누구도 나에게 용기를 주지 않았다. 오직 딱 한명만이 유학을 가자고 같이 하자고 했다. 그것도 함께 하자고 했다. 내 꿈과 그녀의 꿈이 처음으로 맞는 사람이 있었다. 그 말에 용기를 냈다. 접어 놨던 꿈을 처음부터 다시 펼쳐보았다.

돈을 최대한 아끼고, 나와 와이프의 커리어 까지 고려하고, 나도, 와이프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가다보니 이 길이 최적이었다. 외국 생활, 소소하지만 저녁이 있는 삶. 더 나은 라이프스타일. 낯선 환경이지만 모험같은 일상. 가끔은 로키 산맥에서 대자연을 마주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겠다 꿈꿨다. 가끔 동생이 전해주는 소식을 들으면서 나도 그 꿈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다른 것보다도 나와 미래의 와이프가 키울 자식들 때문이었다. 우리 아이들을 유치원 때부터 이 각박한 경쟁과 규격화된 이 사회에서 살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껏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편견과 싸워왔고, 겨우 손바닥만한 행복을 찾기 위해 그 고생을 했는데, 이 대한민국에서 내 자식들에게 또 그걸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서로의 부모님 까지도 모두 모셔오고 싶었다. 짧게 여행은 가능하겠지만, 라이프스타일을 통째로 바꿀 수는 없다. 관광객 수준에 머무르는 것은 돈만 있으면 가능했다. 초청이민을 해 줄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실력으로 보나, 조건으로 보나 내가 제일 유력한 상황이었다.

다음달이면 온 가족이 휘슬러 스키장에서 스키를 타고 저녁이면 바베큐 파티를 벌이면서 아버님. 내년 쯤에는 다 같이 모아서 남미 여행이나 하죠. 어이없는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대사도 종종 떠오르곤 했다. 은퇴 후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 답답하게 사시는 것 보다 그 동안 자식들 키우면서 못했던 더 나은 삶과 행복한 삶을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외 유학을 가고 싶어했던 동생에게 종자돈을 건네주고 보내고 나서 나 정말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능력은 있다라는 사실에 뿌듯했다. 매일 페이스북이든 인스타그램이든 멀리서 동생이 정말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더욱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더 알아봤다. 확실히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찾았다. 힘은 조금 들겠지만 불가능은 아니었다. 결국엔 그런 국가들은 고학력자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역시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딱 1년 6개월만 더 고생하면 언제라도 떠날 준비는 갖출 수 있었다. 부족한건 돈인데 솔직히 그건 문제 측에도 끼지 못했다.

처음계획은 3년안에 떠나는걸 목표로 했는데 솔직히 너무 벅찼다. 물론 목표를 그렇게 잡고나니 5년안에는 가능 할 것 같았다. 와이프의 직장생활도 언젠가는 질릴테고, 내 사업도 언젠가는 원하는 목표까지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와이프가 마지못해 회사를 다니고, 돈 몇푼 벌자고 일에 매달리면서 분유값과 학원비에 시달리면서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제2의 인생이 있다면, 이 생활에 도전을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그런 현실 속에서 꿈꿈 거리면서 살아간다. 정작 다가갈 준비조차 하지 않는다. 정작 그걸 이뤄야 할 시점에 기회를 잡는 것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런 걱정과 부담을 안고 나도 어려운 공부를 시작했고 펜을 다시 잡았다. 그 악조건 속에서도, 동기 마저 흔들릴 수 있는 큰일을 겪고 나서도 이것 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건 나만의 꿈이 아니다. 나와, 미래의 내 와이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자식들, 그리고 우리의 부모님들에게 주고 싶은 선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첫학기에 결국 장학금을 받아냈다. 출발이 좋았다. 비록 그 꿈을 함께 했었던 그 사람이 비록 지금은 내 옆에 없지만, 시작을 할 수 있게 같이 알아봐준 그 친구가 새삼 고마워졌다. 사람이 이 정도의 꿈 하나는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나도 삶을 살아갈 목표가 생기니까. 지금까지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는데 생각보다 성적이 잘나오니 이제 여유가 생겼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진다. 그런 꿈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꿈에 대해서 논하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정작 그것에 도전 하겠다고 하면 비웃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을 보면 그들은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4.

작년부터 만신창이었던 몸 상태를 되돌아 보게 만든다. 아니 이렇게 젊은데 벌써 몸이 여기저기 아프면 어떡해. 자기 몸도 제어를 하나 못하나. 자기 관리가 그렇게도 안되나. 스스로 많이 망가졌었다. 

체육관에 나가기 시작하고나서 7키로가 빠졌다. 일주일에 세번씩 빠지지도 않고 나갔다. 처음에는 스트레스가 심했다. 처음 해보는 운동이고, 운동량이 너무 많았다. 대부분은 일주일이면 다 나가 떨어져. 그렇게 말하는 관장님에게 저는 좀 다를걸요. 라고 말했더니 그날부터 미트를 잡아주기 시작했다. 

두달 만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봤다. 의사가 다소 심각한 얼굴로 물어봤다. 살이 너무 많이 빠지면 원인을 좀 더 알아봐야 되는데요. 전부 운동한거구요. 식사량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이런저런 혈압도 재보더니 의사가 오랜만에 활짝 웃으면서 아주 좋다고 한다. 정말 가벼운 하루를 맞이하니 내가 더 기분이 좋았다. 



5.

지금도 애도 낳고 여전히 와이프와 잘 살고 있는 M군을 만났다.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 하면서 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형 나는 4년 전에 결혼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이 결혼 해야하나 말아야 걱정 할 때 형이 해준 그 한마디가 결정적이었어. 형은 이미 방법을 알고 있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너 부터 좋은 사람이 되라. 이 말은 내가 해준 이야기인데, 누군가는 이 말을 듣고 결혼을 하고, 누구는 그 말을 잊고 살아가고 있었다.

맞다. 이미 결론은 내려져 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된다. 그렇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걱정이다. 나는 여자를 일 하듯이 대하면 안된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니, 이제는 그런 사람이 되었고 누구든지 사랑해줄 준비가 끝났다.

한달동안 날 잘 붙들어준 선생님에게 너무 고마웠다. 그 기나긴 어둠에서 이렇게 빨리 빠져나오게 할 줄은 몰랐다. 상담을 받던 사람에서 이제는 어느 새인가 내가 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 문장만 써야지 하다가 쓰다보니 글이 길어진다. 그냥 이참에 머리속에 있는 것들 다 쏟아내야겠다. 가끔은 내가 글을 안배웠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들곤 한다. 생각이 비로소 언어로 정리되고 나니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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